- 1909년
순종 임금이 건강을 위하여 일본으로 부터 알게된 '옥돌'을 창덕궁 내 동행각에 4구대 2대 설치. 때때로 큐를 잡다. 지점은 70점
어용 당구대의 시설 관리와 기술지도는 전상운(全相雲 : 지점 500점)이며 그 후 제자가 전 종로 신신당구재료상을 경영하던 김효근(金孝根 : 지점 300점)이었다.
- 1920년
경성(京城)구락부(5대) 설치되다.(남대문 옆 일인 관리용)
- 1921년
의주로 관사촌(1대)(경찰청 건너편 일인관리용), 용산관사촌(1대)(용산우체국 뒤 일인관리용), 파주정(波州亭)(1대 일인 경영 최초의 영업 당구장)이 생김.
- 1923년
아사히(旭)구락부(1대 일인 경영, 신세계백화점 뒤)
시가노게(志賀之家)(3대 일인 경영, 명동2가 사보이호텔 옆)
- 1924년
서울에 최초의 한국인 경영 당구장 개업.
조흥은행 본점 건너, 무궁헌(無窮軒) 2대, 주인 임정호(林政鎬).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. 일본 유학생 출입이 많았음.
- 1925년
광교당구장(2대) 개업(조흥은행 본점 자리).
종로당구장(2대) 개업(종로 종각 옆).
- 1926년
동아당구장(2대, 종로2가) 중앙당구장(4대 포켓 1대, 종로2가)
- 1927년
부산, 대구, 인천, 등지로 점차 보급됨.
- 1931년
서울에도 영업용 당구장 늘어남. 한인 경영 당구장 5개소 등 20개소.
- 1935년
일본 가쓰라(桂) 마사꼬, 노리꼬 자매 선수 시범경기차 내한(조선호텔 당구 룸, 종로 중앙당구장, 을지로2가 황금당구장에서 각각 묘기시범)
- 1942년
한국인 최고점자 최용(崔鎔), 만주국 황제 부의(傅儀) 당구사범으로 활약.
한국인 최고점자 박수복(朴壽福), 만주 봉천에서 아마다(天田章) 선수로부터 사사 받음.
- 1943년
일본 당구대 1대(세트)당 850원(일본 스가누마(管沼)대)
- 1944년
제2차 대전 중으로 국가 총동원령 발동(당구장영업 오후 5시~12시까지로 단축영업). 요금도 시간제로 1시간 1원(쌀 1말 대금).
- 1945년
8.15 해방. 서울시내 33개소 당구장이 16개소로 줄어듬.
(다른 업종으로 전업)
- 1946년
해방으로 해외 거주 당구교민 귀국. 최용(신경) 박수복(봉천) 김창섭(상해) 김정환(상해) 등, 당구발전과 친목을 위한 당구장 친선대회 성행하다.(상품 금반지 5돈), 어성당구장 친목대회 박용하 우승(국내 최고점자, 동화백화점 지배인)
- 1947년
대한당구장 친선대회 최석영 우승
- 1949년
태양당구장 친선대회(김창섭 우승)
- 1950년
6.25전쟁으로 당구계의 괴멸 시절
- 1951년
당구인들 피난. 대구와 부산으로 집결
- 1954년
휴전으로 서울 복귀
네이버에서 빌리맨으로 활동하시는 분의 블로그에서 정보를 얻어 짜집기 하였습니다. |